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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신문칼럼

아이들에게 부족한 교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에게 부족한 교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익명의 내담자31세/남

저는 6년째 특수학교에서 근무하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교사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아 인쇄된 종이 글자를 읽거나 손으로 쓴 글씨를 볼 때, 학생 인솔 및 학생 상태 파악 시 업무지원인의 시각적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처음 2년 동안은 교과를 전담하며 다양한 학생들의 특성을 파악했고 어느 정도 특성을 알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작년부터 담임을 맡았는데 시각적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특수학교에는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학생 어머님께서 팔에 긁힌 상처가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직접 확인할 수 없어서 ‘제가 아는 선에서 다친 일은 없지만 다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했지만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다친 건데 파악을 못했나?’, ‘이동 중에 다쳤나?’ 별별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학교에서의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상황 설명 후 마무리 지었지만 ‘내가 학생들에게 너무 부족한 교사인가?’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비장애 교사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을 충족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담임에 지원했는데 학생 몸에 상처가 있다는 민원을 받을 때마다 더 잘 보였으면 다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왔습니다. 학급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이지만 혈기 왕성한 아이들이다 보니 장난을 치거나 이동하다가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임을 알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내 능력이 부족해서 다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학생들과의 생활이 좋습니다. 교과 수업만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들이 가진 장애에 공감하며 저를 통해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커서 선생님처럼 다른 학생들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해줄 수 없는 부분들이 마음에 걸리고 다른 선생님이 담임이었다면 더 발전할 수 있는데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학생들을 위해 담임을 맡지 않는 게 맞는 걸까요?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등 학교생활 중 안전사고는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한다 하더라도 종종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민녀빚음 센터장

저시력 때문에 일어난 문제일까요?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등 학교생활 중 안전사고는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한다 하더라도 종종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사가 아무리 꼼꼼히 체크하고 감독하고, 학생이 아무리 조심하는 얌전한 아이라 해도 예기치 않은 일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 문제는 아이의 탓만도 교사의 탓만도 아니지요. 아무리 조심해도 한순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함께 조심하고,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면 함께 문제의식을 갖고 해결하면 되는 일입니다.
물론 요즘은 그렇지 않은 부모도, 학생도, 교사도 많습니다. 서로의 책임을 묻기에 바쁘지요. 지금 시대가 그렇다고 틀린 것이 맞고, 맞는 것이 틀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학교에서 발생하는 아이들의 안전사고 문제는 함께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지, 저시력의 한계를 지닌 선생님의 문제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교사로서의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왜 안전사고의 원인이 선생님의 저시력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자괴감까지 겪는 것일까요? 저시력의 문제가 없는 교사, 더 나아가 비장애인 교사(저는 이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하겠습니다)도 아이들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안전사고 문제를 종종 겪습니다. 만약 그런 교사들이 아이들을 지도하던 중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장애가 없는 교사들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그 교사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책임이 더 큰 것일까요?
선생님 스스로 자신의 저시력 문제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그 부분을 매우 도드라지게 바라보지 않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완전한 시력을 가진 교사들에 비해 시각적인 면에서 어려움이 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겠지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선생님은 부족한 교사가 아니라, 단지 시력에 한계가 있는 교사일 뿐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십시오

저시력은 분명 건강한 시력을 가진 사람과 비교할 때 약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시력의 한계는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보완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원천적인 약점으로 ‘부족한 교사’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무력한 결론인 것 같습니다. 저시력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노력하면 저시력의 문제가 해결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 혹은 강력한 의지로 여기까지 오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오만일 테니까요.
아마도 저시력을 보완하며 지금에 이르도록 한 선생님의 저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직 생활 중 선생님만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바로 저시력의 한계를 넘어 선생님만의 유일함(uniqueness)을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겠지요.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을 열면 됩니다. 선생님에게 다른 쪽 문을 열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저시력의 문제를 보완해줄 것입니다.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가진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수용한다면, 더이상 그 문제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이것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것은 아직 수용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문을 찾아 열어야 합니다. 열리지 않는 문만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다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테니까요.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한계로 인한 불편함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라는 식의 올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순간, 비로소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요.

 

담임을 희망한 이유를 다시 떠올려 보세요

‘비장애 교사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내가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담임교사를 지원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 이유만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왜 출발이 ‘비장애 교사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어야 할까요. 그냥, 선생님 모습 그대로 ‘나는 어떤 교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고 소망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은연중에라도 ‘비장애 교사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사를 하게 되면, 교직 생활 중 선생님 뜻대로 되지 않거나 선생님이 원치 않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내가 장애 교사여서, 저시력 교사여서’라는 이유로 원인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경험하신 것처럼 자괴감과 같은 강력한 감정들이 뒤따라오게 되겠지요.
선생님은 누구의 결함을 채워주기 위한 교사도, 또 다른 교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한 교사도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그대로, 그냥 교사입니다. 교사 앞에 붙은 형용사는 앞으로 계속해서 써 내려가면 되겠지요.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선생님이 하고 싶은 그런 교사가 되십시오.
선생님은 학교에서 학생들과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아이들을 공감하며, 희망을 심어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고도 하셨지요. 저는 선생님이 장애에 기반해 어떠한 교사가 될지 고민하고, 장애에 기반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공감하며, 장애에 기반해 장애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교사가 되겠다는 틀에 제약되기보다, 하나의 존재(being)로서 아이들과 상호작용하고 공감하며 꿈을 꾸도록 이끌어 주는 유일한(unique) 교사였으면 합니다. 절박하고 끈질긴 소망으로, 선생님을 묶었던 한계를 풀어 버리고, 유일한 교사가 되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