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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신문칼럼

타인의 시선에 갇힌 사람들

“발표할 때 긴장하고 준비한 것을 설득력 있게 못 할까 걱정돼요. 망칠 것 같은 생각에 잠을 못 잤어요. 저를 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한심하게 생각할 거예요.”

“친구들 모임에서 가만히 있거나 괜찮은 반응을 하지 않아서 분위기를 깨면 어쩌나 걱정이 돼요. 모임에 앉아 있으면서 제 표정, 행동 하나하나 다 신경 쓰이고요. 친구들은 모임에 오라고 하지만 계속 피하게 돼요. 차라리 단톡방에서만 활동하는 게 낫지 않나 싶고요.

“학부모가 상담을 하겠다고 찾아왔어요.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딱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표정도 안 좋고. 그 학부모가 다른 학부모들에게 뭐라고 할지, 교무실에서 나를 본 선생님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여서 교무실에 있는 게 불편해요.”

“저랑 다른 교사에게 업무가 주어졌는데, 분장이 필요했어요. 저는 제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교장 선생님께 서면 보고를 했어요. 다른 교사도 자기 일이 아니라 제 일이라고 보고한 거 같고요. 이런 일이 몇 차례 더 있었는데, 일을 합리적으로 한다고 해도 몇 번 반복되니까 내가 너무 매정한가 싶고, 일하기 싫은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싶어 불편해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김민녀빚음 센터장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요즘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이자,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변호사 우영우 밖에 없을 것이다. 픽션의 요소가 가미돼 있기는 하지만 가끔 선배 변호사에게 거침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우영우를 보면, 시원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꿈만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사람은 인지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사회적 능력도 발달한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인지적 경험이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예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은 건강하게 발달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를 자주 접한다. 자신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불특정 다수를 의식하며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자 한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좋은 사람으로 환영받으며, 누구나 찾는 존재가 되는 것, 누가 들어도 부럽다. 하지만 우리가 카멜레온이 아닌 이상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딱 들어맞을 수 있을까.
이런 노력은 끝내 유지될 수 없다. 언젠가는 스트레스 과잉으로 지치고 무기력해지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토록 의식하고 배려했던 타인에게 기대했던 것이 돌아오지 않아 화가 나고 복수심까지 생긴다. ‘내가 자기한테 어떻게 했는데…’라며 이를 악물고, 타인에게 상처받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겪는다. 타인을 의식하느라 자신을 통제하고 억압하니 삶이 고되고 지친다. 이것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가 타인의 삶을 사는지, 자신의 삶을 사는지 의문이 든다. 매사에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이렇게 생각할 거 같아…’라는 전제를 깔고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고 제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언뜻 듣기엔 타인을 의식하고 행동하니 매우 착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는 행동들은 정녕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이들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사람들이 이래서’, 혹은 ‘세상이 이래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니까…’라고 말하면서 까다로운 타인과 엄격한 세상을 탓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 속에서 타인과 세상의 시선을 단정 짓고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 혹은 열등감을 타인에게 투사(projection)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이 타인에게 들러붙은 것이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상처받을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꼭 타인의 시선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어떤 특징이 있을까? 우선, 생각이 많고 자의식이 높다. 자의식이란, 자신에 대해 갖는 의식인데,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들은 자의식이 과잉돼 있다. 즉 자신에 대해 타인이 갖는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더 많이 걱정한다. 타인은 전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조차도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지 염려한다. 그 이면에는 자신은 항상 좋게 보여야 하고,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병든 자기애가 숨어있다. 다시 말해, 자존감은 낮으면서 자존심이 센 것이다.
의존적인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호의를 얻기 위해 지나치게 맞추려 한다. 이들은 타인의 언행이나 눈빛에 따라 쉽게 자신의 감정이 자극되며 그에 따라 오르내린다. 그래서 더욱 타인의 감정과 언행에 예민하게 초점을 두고 맞출 수밖에 없다. 타인의 반응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롤러코스터를 탄다.
성장배경에도 주목할 특징이 있다. 완벽주의적인 부모의 양육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엄격한 부모의 기대 수준에 맞는지 긴장하며 스스로를 검열하고 통제하는 데 익숙하다. 타인 앞에서 혹여나 자신의 단점과 실수가 드러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긴장된 삶을 산다. 이들은 성장해서도 내재화된 엄격한 기준에 합당한 자신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검열하고 제한한다. 과거에 익숙했던 부모의 기준이 일반적인 타인의 기준이 되면서 이에 맞추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서적인 반응은 극히 제한돼 있으며 일이나 성과 중심으로 자녀들과 관계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해 드러내고 지속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거둠으로써 부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무언가 없다면 스스로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고 믿는다. 그래서 딱히 자랑할 것이 없어서 주눅 들고,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가 없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타인과의 만남을 불안해한다.
이들 모두 과거 어느 순간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과거 어린아이로서는 부모가 유일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한때는 적응에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다. 나를 옥죄는 시선의 감옥으로부터 말이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낮은 자존감을 높이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누구의 판단과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주관적인 평가다.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 보살핌과 지지가 아니라 나의 인정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또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던 습관을 멈추고, 자기를 객관화해야 한다. 자신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객관화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 그 훈련이 필요하다.
정체성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와 같이 자기 존재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삶의 목적으로 두며 매 순간 가치판단하면서 일관성 있게 사는 것이다. 이 또한 주관적인 경험이다. 때문에 타인의 시선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존재감을 경험한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이 자기 정의를 내림에 있어 타인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계도 관계 나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정체성을 알면, 타인을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자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해서 그에게만 잘 보이려 노력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시선만 의식하고 살아도 덜 옥죄지 않을까? 이제, 타인을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 ‘나는 누구인지’ 깊이 알고, 그에 맞는 옷을 입고 살기를 선택하자.
어느 날 필자의 귀에 선명히 꽂힌 노래가 있다. 가수 악동 뮤지션의 ‘인공 잔디’였다. 가사는 대략 이렇다.

‘나에게는 해도 물도 필요하지 않아. 그런 거 없이도 배부르게 살 수 있으니까

나에게는 시들 걱정 필요하지 않아. 밟히고 뭉개져도 내 색을 잃지 않으니까. 모든 게 좋아 보여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나도 숨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바람이 불면 간지러워하는 들판을 봐. 흔들거려도 내 풀잎은 느껴지지 않아

흙 땅과 맞닿은 맨살에 부끄러워하는 저 풀들과 다르게 난 생기가 들지 않아

그들은 좋아 보여. 시들어가는 모습도 아름다운 이유는…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빛없이 물 없이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잔뜩 상해버린 가짜 풀잎이 뜯겨지네. 나도 숨 쉬고 싶어

비를 삼키고 뿌리를 내고 싶어. 정말 잔디처럼

나도 느끼고 싶어. 살아있다고 하늘을 펄럭이고 싶어. 잔디처럼.’

인공잔디는 밟히고 뭉개져도 자기 색을 잃지 않고, 시들 걱정이 없다. 해와 물이 없어도 배부르게 살 수 있다. 인공잔디는 사계절 언제 보아도,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수 있음을 으스대는 것 같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다. 바람이 불어도 간지러움을 느낄 수 없고, 흙에 닿아도 생기가 돌지 않기 때문이다. 내리는 비를 삼키고 땅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다. 숨을 쉴 수 없는 것이다. 빛과 물이 없이도 영원할 것 같았지만, 결국 가짜 풀잎들이 뜯겨져 간다. 인공잔디는 시들어가는 모습조차 아름다운 진짜 잔디가 되고 싶다. 바람에 펄럭이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 진짜 잔디처럼 말이다.
악뮤가 어떤 의미를 담고 가사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상처받기 두려워 안전함을 선택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디는 진짜 잔디일 때 숨을 쉴 수 있다. 우리도 ‘진짜 나’일 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 다운 삶’이 숨을 쉬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