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내면과의 대화… 관계를 풀고, 잇는 열쇠입니다
김민녀빚음 센터장
인간의 동기는 행동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목표를 향하도록 이끈다.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과 신뢰 관계를 맺고, 집단에 소속돼 사회적 행동을 하는 소속의 동기는 인간의 주요 동기로 꼽힌다. 우리는 사회적 승인과 인정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고 사랑한다고 느낄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처크 놀랜드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진다. 그는 무인도에서 여자 친구의 사진과 윌슨이라고 이름 붙인 공과 대화하며 사회적 기아와 사투를 벌인다. 윌슨과의 대화의 시간이 없었다면 과연 처크 놀랜드는 무인도에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영화는 소속과 사랑의 욕구가 인간의 생존에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단에 소속되고 사랑받고자 하는 인간 동기의 중요성은 학대적인 관계에 관한 한 연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해자에게 가해를 받는 것보다 가해자가 떠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는 인간관계는 부부, 부모-자녀, 친구, 직장동료 등 다양하다. 특히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동료는 가족 이상으로 중요한 관계다. 필자는 교권상담을 진행하면서 교원 간 갈등과 소외, 외로움과 등 어려움을 호소하는 교사들을 여러 차례 접했다. 몇 해에 한 번씩 근무지를 이동해야 하고, 각자의 수업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근무 환경은 파티션의 높이만큼 동료들 간의 정서적, 물리적 거리를 느끼게 한다고 호소한다. 그 와중에 동료들 간에 갈등이라도 생기게 되면 처크 놀랜드가 사투를 벌인 무인도 생활이 교무실 내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것 같다.
- “같은 학년에 같은 교과를 맡은 선생님이 두 분 더 계세요. 두 분은 저보다 먼저 이 학교에 와서 합이 좀 맞는 거 같아요. 시험 문제를 내거나 수업 관련 자료들을 만들 때 두 분 사이에 제가 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혹시 나만 분위기를 못 맞추는 게 아닐까 싶고. 그래서 저를 좀 불편하게, 안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신경 쓰여요. 편하지 않아요.”
- “학생부를 맡게 됐는데 마침 학교폭력이 발생했어요. 학부모와 학생 사이 갈등을 중재하고 처리해야 하는데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안 도와주는 거예요. 학교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복잡한 문제에 끼고 싶지 않은 거겠죠. 모두 나 몰라라 하는데, 기존에 친절했던 선생님들도 그러니까 얼마나 외롭고 힘들던지… 대인관계에 회의가 느껴져요.”
- “신학기만 되면 교사들끼리 눈치 경쟁이 치열해요. 힘든 부서를 맡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싱글에 거절 못하는 저만 꾸역꾸역 도맡아 하게 되는데 아무도 인정해주지는 않고 당연하게 생각해요. 동료애가 안 느껴져요.”
- “저 같은 영양교사, 보건교사, 상담교사들은 소속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제 일과 관련 없는 업무를 하면서도 도움을 구할 선임 교사는 없고, 학교에서 늘 혼자만 동떨어진 느낌이에요. 저를 같은 교사로 생각을 하기는 하는지….”
- “그 선생님은 저를 괴롭히려고 학교에 오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해도 싫다, 저렇게 해도 싫다. 그냥 제가 하는 건 뭐든지 싫어하고 트집 잡고,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해요. 유독 저한테 심해요. 자기 스트레스를 저에게 푸는 거 같아요.”
사람들은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면 상대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틀이 있다. 그것을 흔히 상라고 규정하고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상처 받으며, 관계에 회의를 품고 급기야 날을 세우고 다투거나 마음의 빗장을 걸어버린다. 이러한 관계 문제는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상대방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은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대인관계는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나의 행동은 상대방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상대방의 행동은 나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준다.
타인과 세상을 보는 ‘도식’과 패턴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부모를 비롯한 주요한 타인과 여러 사회적 환경의 영향 아래에서 자란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견고해지고 일반화돼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가령, ‘동그라미’라는 정보가 뇌로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자. ‘세모’의 뇌를 가진 사람은 동그라미를 세모로 인식하고, ‘네모’의 뇌를 가진 사람은 동그라미를 네모로 인식하며, ‘별’의 뇌를 가진 사람은 동그라미를 별로 인식할 것이다. ‘동그라미’는 그렇게 개인에 따라 세모 혹은 네모, 그리고 별로 변질된다.
이처럼 타인과 세상을 보는 개인의 생각의 틀, 즉 도식(schema)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간극을 만든다. 이는 관계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각 개인의 기대가 만들어낸 허상으로 쉽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가 진행될수록 상대방의 실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상대방을 실제로 이해하기보다 상대방이 변했다고 결론 내리고 상처받게 만든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마다 관계에서의 굳어진 도식과 행동 패턴이 만들어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 반응을 보이며 특정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 갈등의 악순환을 겪는 사람들은 과거 한 때는 유용했지만, 지금은 쓸모없는 패턴을 끊어야 한다. 관계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인 사고와 행동의 연결고리를 인식하고, 과거에 익숙한 사고와 행동이 아닌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런 도전을 통해 굳어진 관계 패턴을 유연하게 바꾸면, 관계 속에서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 갈등 속에 있는 관계를 떠올려 보자. ‘상대방에게 한 말이 정말 내가 하려던 말이었을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대부분 갈등 관계 속에서 자신이 진짜 해야 할 말을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후회할 말을 하거나 무기력하게 입을 닫아 버리기 일쑤다. 자신의 속내를 분명하게 표현하기란 어렵다. 내가 한 말이 마음의 말이 아닐 때가 많듯이, 겉으로 들리는 상대방의 말이 상대방이 진심이 아닐 때가 많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말을 하며 오해하고 오해 받는다.
갈등 이면에 좌절된 나의 욕구 봐야
굳어진 관계 패턴을 유연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차분히 들여다봐야 한다. 관계 갈등이 상대방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치부하고 모든 문제를 상대방에게 던져버리지 말고, 갈등 이면에 좌절된 자신의 욕구를 봐야 한다. 즉 상대방의 행동에 집중해 잘못을 캐내려 하기 보다 ‘내가 저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뭐지?’라고 물음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좌절된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자기 내면의 진정한 욕구, 좌절된 욕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됐다면, 다음에는 그것이 나로부터 온 것인지, 상대로부터 온 것인지, 문제의 소유를 가려야 한다. 나로부터 온 것이라면, 내가 변해야 한다. 관계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내가 변하면 상대방과의 관계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을 왜곡 없이 똑바로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관계 문제의 발단이 됐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바꿔야 한다. 자기 자신이 온전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져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상대방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이해되며, 결국 관계가 나아가야할 방향도 더 뚜렷하게 보인다.
‘내가 바뀌어야 상대방과의 관계가 바뀐다’고 하면 “상대방이 문제인데 왜 내가 바뀌어야 되냐”며 역정을 내고 반문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내가 바뀌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발견하고, 또 문제의 소유를 분명히 알면 관계 속에서 억울할 것도 없고 화날 것도 없으며, 이해 안 될 일도 없다. 이렇게 자기에 대한 통찰은 불투명하게 엉켜 있던 관계를 풀고, 새롭게 관계를 잇는 시작이 된다.
끝으로 관계 문제의 소유가 상대방에게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해야 한다. 우선, 상대방에게 문제 소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고 싶은지, 갈등을 계기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지 등 관계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을 근거로, 상대방과 어느 정도의 정서적 거리를 유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상대에게 향한 시선, 내면으로 돌리자
다른 하나는 상대방에게 문제 소유가 있으며, 그 문제가 일반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다. 인생은 어렵고, 사람은 복잡하다. 살다 보면,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기치 못한 관계 갈등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상대방의 성격에 ‘병리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이며, 임상 현장에서는 이를 ‘성격장애(지각, 사고, 행동에 융통성이 없고, 부적응적인 패턴이 만성적으로 나타나 사회나 직업적 측면에서 심각한 장해를 초래하고 상당한 고통을 야기하는 성격 특징을 지닌 장애, DSM 5)’로 진단할 수 있다.
가령, 타인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조종하며, 착취하고, 가학하며, 소소한 일에도 의심하고 불신하며 경계하는 등 대인관계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노력도 쉽게 통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노력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존중하고 존중 받는 관계 형성이 어렵다. 이 경우는 갈등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문적 치료가 필요하므로 할 수만 있다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관계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면 상대방에게 향했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반복적인 관계 갈등에 영향을 주는 자신의 습관적인 사고와 행동 패턴의 변화를 위해 용기 있게 뛰어들어 보기를 권한다. 온전한 자기 이해와 성장이 풀어야 할 관계는 풀게 하고, 이어야 할 관계는 잇게 하며, 끊어야 할 관계는 끊도록 이끌 것이다. 나를 바로 앎을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소속돼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진정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된다.